춘천안디옥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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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남춘천 감리교회의 기억
-안디옥교회 100주년을 축하하며-
 
 
강원연구원장 육동한
 
 
 1. 1970년. 아버지께서 군청으로 발령이 나서 어머니와 홍천에 가신 그해  춘천에 남은 누나와 나는 남춘천역 앞 동네로 옮겨 할아버지, 할머니랑 지내게 된다.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인 나는 신실한 신자이신 할머니와 누나를 따라 새로운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옆집에는 만종이, 경종이 형제도 살았는데 그들은 주일학교 고참이기도 하였다.
 
 남춘천 감리교회. 그 교회는 역 플랫폼을 건너 논길을 제법 따라가면 만나는 낮은 산 중턱의 작은 교회였다. 산 아래에는 아담한 연못도 있었고 거기서 한참을 더 들어가면 지금은 거의 도시 안에 들어와 버린 국사봉(國士峰)이 어린 눈에 큰 산의 자태로 주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2. 손바닥만했던 교회 앞마당 종 받침탑에는 쇠종이 걸려 있었다. 그렇지만 새벽이 되면 큰 스피커에서 나오는 찬송 반주가 종소리를 대신해 저 건너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 다녔다. 그 멜로디는 성도들의 발걸음을 교회로 재촉하였는데 새벽에 잠을 깨면 할머니는 당연히 곁에 계시지 않았다. 그 시간 교회 강단 아래 작게 웅크려 당신의 서러운 삶을 스스로 위로하고 안타까운 자식, 손자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계셨으리라. 그 시절 나는 낮고 은은한 그 천상의 음률에 익숙해지면서 세상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어딘가에 있을 하나님의 세상을 종종 상상하곤 했었다.
 
 그때 담임목사님 이름은 ‘김종철’이셨다. 내가 아직도 그 이름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당시 교회에서는 누굴 시켜 종을 치게 하기가  거북스러웠다는 농담 같은 얘기를 재미있게 들었었기 때문이다. 사연인즉 종을 치게 하려면 “종쳐라! 종쳐라!”하고 소리를 질러야 하는데 자칫 목사님이 들으시면 당신을 부르는 줄 아실까 하여 굉장히 조심해야 했다는.......
 
 


  3. 예나 지금이나 성탄절은 아이들에게 큰 설렘으로 다가온다. 특히 성탄  전야를 위한 준비기간은 긴 잔치와 다름없다. 성탄절 날 예배를 마치고 받는 떡(주로 하얀 종이에 싼 따끈따끈한 시루떡)은 해 넘어가기 전 최상의 상급이기도 하였다.
 
 남춘천 교회 첫해 나는 성탄 전야의 연극무대에 오르게 되었다. 거의 50년  전의 각본과 연기를 제대로 기억할 수는 없지만 내 역할은 두 명의 거지소년 중 하나였다. 이름하여 ‘거지 2(two)’. 나는 그때 일찌감치 깡통을 차게 되면서  인간 소외의 아픈 현장을 간접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연기력을 인정받았는지 아니면 지원자가 별로 없었는지 이듬해에도 다시 그 무대에 오른다. 그리고 단 한해 만에 엄청난 신분 상승을 경험하게 되었다. 동방박사 세 사람 중 하나가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그 교회를 오래 다닌 같은 학교 친구 하나는 헤롯왕이 되어 그전과 별 차이 없는 권세 누렸었건만.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KakaoTalk_20190723_133808554.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1013pixel, 세로 657pixel
 
 
 그런데 행사 후에 큰 소란이 생겨버렸다. 그 밤 작은 교회 신발장과 주변에는 평소 수용 능력을 훨씬 초과하는 신발들로 꽉 차 있었는데 공연이 끝날 무렵 서로 바뀌거나 사라지는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내 소중한 검정 털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결국 나는 주일학교 남자 선생님 등에 업혀 밤하늘의 별을 따라 집으로 가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베들레헴 아기 예수님을 경배한 동방박사들처럼.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KakaoTalk_20190723_133808535.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839pixel, 세로 590pixel
 
 
 
 3. 교회 갈 때마다 정말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다. 초등 5학년의 알량한 지성으로는 어림짐작하기 어려웠고 아마 조금 내성적인 성격에 누구에게 물어 보기도 망설였을 것이다.
 
 그 무렵 예배당 오른쪽 벽에는 큰 종이 위에 개인별 십일조 막대그래프들이 서로 키 재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난생 처음 보는 성씨의 이름이 맨 뒤에서 항상 제일 높은 막대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것은 바로 ‘무명씨’란 이상스런 이름이었고.
 
 무명씨? 무명씨? 그분은 과연 어떤 사람이란 말인가??!!
 
 늦었지만 그 뜻을 이해한 것은 중학생이 되어 한문공부를 하면서일 것이다. 그때 나는 비로소 그 무명씨가 無名氏일 것이라 확신하게 된다. 그리고 왼손이 한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신 그분(들)의 겸손한 신앙도 되새기게 되었다.
 
 
 4. 안디옥 교회 10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양극화와 소외가 깊어지고  공동체보다는 개인이 더 주인이 되는 혼돈의 시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은 지난 100년과 같이 앞으로 100년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안디옥 교회의 사명이라 믿는다. 교회 모든 성도를 위해 기도드린다.